[22 May 2005] 필기구는 그 사람의 성품을 반영한다

2005. 5. 22. 02:46Fountain Pens

3달여 전인 지난 2월. 지금은 개업하신, 당시 같은 사무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시던 이상필 변리사님께서 생뚱맞게도 꿈에(!) 나타났다. 꿈 속에서 내게 툭 던지셨던 그 한 마디.

'필기구는 그 사람의 성품을 반영한다'

이상필 변리사님께서 나처럼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니고, 평소 그 분의 매사 진지한 표정과 자세, 그리고 자신감 넘치며 무게있는 어조 등을 빌어 나의 무의식 속의 생각이 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필기구는 그 사람의 성품을 반영한다'

쉽게 흥분하는 사람은 필기할 때 손에 힘이 많이 가는 편인 것 같다. 평상시에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필압을 낮춰 필기하더라도 조금만 흥분하면 부지불식간에 손에 힘이 많이 가게 되는. 그러한 사람은 경성의 펜촉을 사용해야만 하리라. 반대로 매사 차분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필압이 낮은 편이며, 따라서 경성의 펜촉을 사용할 때는 종이와 펜촉이 일체가 되는 듯한 맛(!)이 부족하기에 연성의 펜촉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펜촉 외의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과시욕이 강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몽블랑 같은 제품을 선호하고, 화려함을 좋아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은 역시 칼라풀한 디자인을, 단정함을 좋아하며 매사 자신의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사람이라면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떠한가. 내가 현재 애용하는 만년필은 좌측 상단 사진의 몽블랑 146과, 우측의 워터맨 세레니떼. 146에는 파커 블랙 잉크를, 세레니떼에는 플로리다 블루 잉크를 넣어 사용한다. 세레니떼는 2년여 전인 2003년 가을부터, 146은 작년 늦가을부터 사용.

둘의 공통점은 블랙이며 심플한 디자인. 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점은 146이 연성 펜촉인 것에 반해 세레니떼는 경성 펜촉이라는 점, 그리고 146이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같은 이미지라면 세레니떼는 만년필로서는 파격적인 곡선의 디자인과 새끼줄을 엮어놓은 것 같은 형상의 독특한 그립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 등등.

나?

약간의 과시욕과 주체할 수 없는 자신감과 약간의 소심함, 실수를 좋아하지 않는 지나친 꼼꼼함과 정리정돈. 그러면서도 일상으로부터 가끔은 일탈하고 싶은. 146과 세레니떼의 디자인. 그리고 평상시에는 매우 냉정하고 차분하며 이성적이지만, 곧잘 흥분하기도 하고 감성적, 감상적이 되기도 하는. 146과 세레니떼의 닙. 내가 애용하는 만년필들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까. 다른 사람들의 필기구도 그 사람의 성품을 반영할까? 반대로 항상 접하는 펜을 보면서 자신의 고쳐야 할 점에 대해 반성하며 보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시나브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늦은 밤, 펜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ps. 그나저나 저 사진 속의 146 밑에 깔려있는 PCT 출원은 언제 번역하냐..
지금 사진찍으면서 이 시간까지 놀고 있을 때가 아닌데..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