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의 추억

2017. 10. 28. 21:54Fountain Pens



-긴 글이다-


우연히 만년필 기사를 접하게 되어, 필 받아서 올리는 만년필 사진.


내 최초의 만년필은 서독의 Reform사의 모델명도 모르는 만년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부모님께서 동네에 있던 "우리문방구"에서 구입해서 선물로 주신 만년필.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만년필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고나 할까.


이 만년필을 바라보면, 6년간의 초등학교시절을 마치고 기대와 두려움을 가지고 진학한 중학교 입학식이 생각난다. 비오던 날의 입학식, 강당에서 교실로 향하던 발걸음, 반배정을 받고 난 후 처음 접한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다른 친구들과 만년필을 가지고 서로 자랑하던(^^) 기억, 만년필에 촉사이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왜 내 만년필(F촉)은 다른 친구의 것보다 굵게 나오지' 하고 불평하며 뒤집어써보던 기억(뒤집어 쓰면 가늘게 나오니.. ^^) 등등. 중학교 3년간의 추억이 Reform만년필에 담겨있다. 이 만년필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 두 번째 만년필은 Miko fancy(아마도 바른손팬시 계열이었던 듯)에서 나온 만년필로, 당시 만원이었던 만년필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만년필을 잊고 살다가 고 2때 학교 앞 중앙문방구에서 샀다.


중1 때는 초등학교 졸업선물,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쓰던 친구들이 꽤 있었지만, 이때는 그러하지 않았다. 나 혼자만 꿋꿋이. ^^ 캐트리지 방식이던 그 만년필의 캐트리지에 빠이롯트 잉크를 주사로 채우던 기억부터 시작해서, 만년필에서 비롯된 만년필을 사용하시던 선생님과의 대화, 가까워짐 등등, 고2~3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하지만 이 펜은 시간이 지나자 배럴이 끈적끈적해져,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만년필인 Parker45는 장군이 떠오른다. 웬 장군? 군복무당시 장군 운전병이었기 때문. 내 전역선물로 장군님께서 주신 만년필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장군 자신은 146을 쓰고 계셨고 선물받으셨던 좋은 만년필들도 다수 가지고 계셨기에, '에이, 좀 더 좋은 걸 주지'하는 얄팍한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개 병의 전역을 축하해주며 지으시던 미소를 떠올리자 그 부끄러운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도 가끔 이 펜을 볼 때면, 군복무하면서 들었던 미운정, 고운정들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네 번째 만년필은 독일 로트링사의 artpen. 이 펜을 보면, 치열했던 20대 중후반이 생각난다. 변리사 1차 시험을 5월에 치르어 붙은 후, 8월 하순에 있었던 논술시험인 2차시험을 대비해서 artpen으로 답안작성연습을 종이에 불이나게(?) 했기 때문. 6, 7, 8월 세달 동안 사용한 종이양이 3500여장 정도 되려나.. 글씨로 가득찬 종이로..


artpen을 보면, 도서관에서 눈물과 땀이 섞인 육수(?)를 흘리며 보냈던, 나름대로 치열했던 그 여름날이 생각난다. 정작 2차시험을 볼 때는 엄청난 긴장으로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시험 시작과 동시에 펜촉이 휘어버려, 아무런 준비 없이 가져갔던 153볼펜으로 시험을 봤지만.. ㅡ.ㅡ;;;


사진의 펜들은 위에서 언급한 펜들은 아니고, 변리사가 된 이후, 그러니까 직장인이 된 이후 가졌던 펜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오로라 그린 마블, 파커 51, 파커 75 인시그니아, 파커 75 버메일, 워터맨 세레니떼, 제일 아래 좌측 2개는 파커 듀오폴드 모자익 레드, 우측 1개는 몽블랑 146.


첫 번째 줄의 오로라 그린 마블은 변리사가 되어 수습때부터 3년 정도 애용했던 펜. 닙이 단단해서 필압이 센 편인 내게는 아주 딱 맞는 펜이었다. 사회 초년병의 추억이 잔뜩 담겨 있는 펜.


두 번째 줄의 파커 51은 파커사의 창립 51주년 기념으로 1900년대 초중반에 나왔던 펜인데, 펜촉이 거의 보이지 않는게 특징. 이베이에서 구한 오래된 펜이었지만 필러도 오리지널이었던 멋진 펜. 이전 주인이었던 미국인이 특정 각도로 펜을 애용해서, 그 각도로 펜을 사용하면 너무나도 부드러운 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펜촉이 특정 방향으로 살짝 닳아서 약간 칼리그래피 비스한 느끼도 났고. 변리사 시험을 본 후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 일본어 공부를 할 때 히라가나가 멋지게 써져서 좋아라 했던 펜이다. ㅎㅎ


세 번째 줄의 파커 75 인시그니아는 내가 이베이에서 구했던 첫 번째 펜으로 1970년 전후에 생산되었던 펜. 파커 75에 필이 꽃혀 있던 2002년에 구했다. 수험생이 공부는 안하고 펜을 찾아 돌아다니다니.. ㅡ.ㅡ;;; 파커 75의 특징이 바로 adjustable nib이라고 해서, 닙을 돌려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닙 주면에 눈금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펜에는 애정이 별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네 번째 줄의 펜 때문에.


네 번째 줄의 파커 75는 내가 구하고 싶어서 그토록 찾아헤메던 버메일이다. 사실 위의 인시그니아는 버메일을 구하려다 못구하고 우연히 구했던 펜. 버메일은 스털링실버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난 저 클래식한 디자인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파커 75는 초기버전은 미국에서 생산되었고 후기 버전은 프랑스에서 생산되었는데, 미국에서 생산되던 초기버전이 명품(?)으로 간주되었다. 내 버메일은 초기버전이었다.


다섯 번째 줄은 워터맨 세레니떼. 내가 이 펜을 구입한 이후로 다른 버전의 세레니떼들이 나왔지만, 이것이 최초의 세레니떼다. 난 단순한 검정색의 이 세레니떼가 더 좋다. 이건 오래된 건 아니고, 2000년을 전후해서 발매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특유의 디자인이 얼마나 멋지게 보이던지.. 두껑이 닫혀 있을 때는 둘둘 만 종이문서처럼 보이고, 후드를 펜 뒤쪽에 꽂았을 때는 마치 날렵하게 휘어진 도(刀)처럼 보이지 않나? 내게만 그렇게 보이나? ㅎㅎ 이를 위해 뚜껑이 특정 각도로만 꽂히게 되어 있다는.. 그리고 닙 근처의 손으로 잡는 부분은 마치 끈을 꼬은 듯한 디자인. 어느 하나 눈길을 사로잡지 않는 부분이 없다.


마지막 줄의 왼쪽 2줄은 파커의 듀오폴드 모자익 레드. 2003년 경 모자익 레드, 블루, 블랙 모두 있었는데(지금은 모두 없다), 사진은 레드만 있네. 오른쪽 끝은 몽블랑 146.


2000년대 초중반에 만년필에 푸욱 빠져 여러 만년필을 거쳤는데, 수년동안 변함없이 현재까지 사용하는 만년필은 워터맨 세레니떼와 몽블랑 146이다. 세레니떼에는 오로라 블랙 잉크, 146에는 워터맨 플로리다 블루 잉크를 채워서.


이제는 더 이상 만년필을 사지도 않고 새로운 만년필에 관심을 두지도 않지만, 가끔 열정적이었던 예전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만년필을 보면, 그 하나하나의 펜, 그 하나하나의 스크래치에 담긴, 잊고있던 추억들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때그때는 힘들었을 지는 몰라도, 후에 미소를 지으며 펜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과 여유.. 아마 만년필이 아니면 가져볼 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