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Aug 2004] 4박5일의 중국여행, 마지막날 - 북경의 이화원, 유붕관 & 왕부정거리.

2004. 9. 11. 09:06China 2004

이번 중국여행에서의 마지막 밤이라서 그랬는지 아쉬운 마음에 새벽까지 잠을 못이루고 뒤척이다가, 늦게서야 잠들었다. 몇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창밖을 보니, 북경도 내가 떠나는 것이 아쉬웠는지 슬픔의 빗방울을 떨치고 있었고.. (음.. 내 평소 분위기에 맞지 않는 너무 어색한 분위기의 문장이라고? 사실 나도 고등학교 땐 문학소년이었다.. ^^;)

오늘은 중국 황족들의 별장이었던 이화원, 중의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북경의대를 들른 후,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거리라고 할 수 있는 북경의 왕부정거리를 둘러본 후 귀국한다.


이화원(이和園) 입구. '이'는 우리 나라에 없는 한자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저 한자를 우리나라말로 '이'라고 읽지? 우리나라에 없는 한자인데? 흠..

비가 상당히 많이 오는 악천후속에서 사진을 찍어,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것이 별로 없다. 사진의 ISO(감도)를 많이 높이고 셔터스피드를 빠르게 하여 빗방울은 별로 안나왔지만.. 위 사진의 오른쪽 상단을 보면 하늘에 뭔가가 있는데, 저건 내 우산의 끈(?)이 찍힌 것이다. 한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만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화원의 현판. '이'는 정말 우리나라에 없는 한자인 것 같다. 황제 광서제의 친필.

이화원에 대해 먼저 상투적인 설명을 잠시 하면..

둘레 8km인 인공호인 쿤밍호(혼명호, 昆明湖)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완서우산(만수산, 萬壽山)이 북부에 있고 모든 건축물은 산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통칭 천간낭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장랑(長廊)이 눈길을 끈다. 12세기 금나라 때 지은 작은 궁전을 시초로 명조(明朝)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청조(淸朝)의 건륭제(乾隆帝)가 많은 전각(殿閣)을 세우고 정원을 꾸몄다. 청말, 46년간 중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여인, 서태후(西太后)가 살았던 별궁으로서 유명하다...고 한다.

더 설명하자면...

1860년 톈진(天津) 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 교외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을 때 이곳도 화재를 입었다. 1894년 서태후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개축을 위해서 횡류(橫流)하였는데, 이것이 청 ·일전쟁(淸日戰爭)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이징 최고의 관광명소로 호상에 떠 있는듯한 석주(石舟)와 석교(石橋),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가 선명한 건축물과 장랑(長廊) 등이 경관의 조화를 이룬다. 199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화원 내부의 괴수상. 이러한 상상의 동물의 상이 많이 있다.


이화원 내의 인수전(仁壽專) 앞의 봉황과 용상.

약간 핀트가 나간 사진이다. 사진을 잘 보면, 이 건물의 입구 좌우측에는 바로 봉황이 있고, 그 옆에 용이 있다. 즉, 용보다 봉황이 더 건물의 정문쪽에 있는 것.

원래 용이 남자를 상징하고 봉황이 여자를 상징하며, 따라서 용이 정문쪽에 있었고 봉황이 바깥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태후가 권력을 잡으면서 '남자? 그까짓 것들이 뭐야?'하면서 봉황을 정문쪽에 놓고 용상을 바깥쪽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아, 서태후가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셨다고?


앞서 말한 용상. 이 용의 앞발에는 여의주가 있었는데, 서태후가 이것 조차 빼버렸다고 한다.


이곳 이화원으로 이동하는 길은 상당히 교통체증이 심하였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가 서태후가 권력을 잡기까지의 과정을 정말 리얼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줬는데.. 백과사전의 도움을 약간 받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태후는 원래 청나라 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었다. 정실부인은 동쪽에 산다고 하여 '동태후(東太后)'라고 불리고, 서태후는 후궁이어서 서쪽에 살아서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렸다고 한다. 권력욕이 많았던 서태후는, 정실부인이 아들을 못낳는 사이에 여러가지 술수를 동원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함풍제'가 죽자 6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동치제'이다. (마지막 황제 부의하고는 상관없다.. ^^;)

황제가 나이가 어리면, 16살이 될때까지 황제의 어머니가 정치를 한다고 한다. 이를 '섭정'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후궁이었으므로 동태후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동태후는 권력에는 관심없는 '여자'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잘 못하게 되니 권력욕이 많으나 이를 숨기고 있던 서태후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리하여 동태후와 서태후 둘이서 같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동태후를 죽이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1875년 동치제가 죽었는데, 동치제가 16살이 되면 동치제의 '친정'이 시작되고 자신의 '섭정'이 끝나기에 자신의 친아들인 동치제를 살해했다는 야사가 있다. 아무튼 그 후, 서태후는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이 또 다시 섭정을 하였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강유위, 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무술변법, 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이화원에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서안, 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에 유폐되어 한을 품고 죽어 서태후를 그 다음날 데려갔다는 설, 서태후가 자신이 먼저 죽으면 광서제가 권력을 잡을 것을 막으려고 자신이 죽을 것 같자 광서제를 독살시켰다는 설 등이 있다. 아무튼 서태후는 그렇게 46년간 중국의 정권을 한손에 잡고 있던 무서운 여자였다.


위 사진의, 여의주를 들고 있던 용의 앞발. 자세히 보면 여의주가 붙어있던 자국이 있다.


서태후가 마셨다는 우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을 갈 때에도
이곳 이화원에 들러 저 물을 마시고 피신을 했다고.


춘래도(春來島). 이화원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는 섬이라고 한다.


공자의 위패를 둔 건물. 춘래도 옆에 있다. 건물 앞에는 연꽃잎들이 가득. 이에 대해서는 후술.


위 건물 앞에서 사진 찰칵. 사진을 위해서라면 비가 와도 우산을 던져버리고.. ^^;


서태후의 침실이 있는 건물, 낙수당.

서태후는 이곳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끼 식사가 농민들 만명의 하루 생활비였다고.. 그러면서도 태평성대를 구가하길 바랬던지 낙수당 앞에는 학(鶴, 허)과 병(甁, 핑)과 사슴(鹿, 루) 동상이 각각 한 쌍씩 놓여 있는데, 그 발음이 화평로(和平路, 순조로운 인생의 길)와 같다고 한다.

한편, 서태후의 그림 또는 사진을 보면, 손가락에 매우 긴 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은'으로 만든 것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 항상 그것으로 찔러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시험했다고 한다.


이화원의 또 다른 볼거리, 장랑(長廊).

이곳은 길이가 730m나 되는 회랑이라고. 이화원의 호수를 따라 지어졌다. 뭐하는 곳이냐고?


물론 산책도 하는 곳이지만, 이곳 회랑을 보면 그림이 수없이 그려져 있다. 위 그림은 그 중 하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그린 것. 난간에는'서유기', '삼국지연의', '백사전' 등에 나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서태후는 심심하면(?) 이곳을 거닐며 옆에 있는 내시에게 그림에 맞춰 이야기를 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ㅡㅡ;


장랑에 있는 그림의 일부.


쿤밍호 기슭.


쿤밍호 기슭, 서태후의 침실 앞의 부두. 서태후가 이화원에 들어서면 배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배를 타고 이곳 부두에서 배에서 내린 후, 침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보이는가, 저 넓은 호수가? 이것이 인공호수라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원혼이 서린 곳일런지..


쿤밍호 곳곳에 있는 연꽃과 연꽃잎.

서태후가 한 스님에게 태평성대를 구가하기 위해 이곳 이화원에 어떤 것을 설치(?)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스님이 연꽃을 곳곳에 심으라고 했단다.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서태후는 그렇게 했고.. 사실 스님의 본 뜻은, 걷은 이쁘고 화려하지만 더러운 물에 사는 연꽃처럼, 서태후가 겉은 화려하고 멋진 이화원에 살고 있지만, 서태후 네가 사는 곳은 연꽃이 사는 곳처럼 더러운 곳이다라는 것이었다고.


이화원을 나와 북경의대를 들렀다.


북경의대의 한 건물, 유붕관(有朋館).

관광패키지에 왜 이곳이 포함되어 있느냐.. 중국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관광객에게 중국의 자랑거리를 소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의 또 다른 자랑, 중의학(중국에서는 한의학이라고 안하고 중의학이라고 한다)을 자랑하기 위해 관광객을 유치한 것. 이곳에 가면, 북경의대 교수들이 공짜로 직접 진맥도 해준다.

진맥은, 상당히 정성을 들여 자세히 해주는데, 다른 아주머니들에게 무슨 말을 그리도 많이 해주는지.. 그런데 정작 내 차례일 때는 내 맥박을 살피고 혀를 살피더니, '건강해, 젊은 사람은 다 건강해!' 딱 이 말밖에 안했다. 뭐 몸이 안좋아서 여러 말 듣는 것 보다야 낫지.

진맥을 본 후, 복도로 나와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는데, 방금 내 진맥을 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밑엔 영어로 '북경의대 부총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음, 내가 건강하긴 건강한가 보군. ^^;;;


글자 클로즈업. 이 사진은 왜 찍었나 몰라.. ㅡㅡ;

북경의대에는 젊은 조선족 3세 교수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중국으로 오셨다고. 우리나라말이 아아주 유창했다.

이곳에서 자연산 동충하초도 봤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등에 풀이 있는 누에는 인공이란다. 자연산 동충하초는 풀이 한줄기만 나는데, 그것이 등에 나는 것이 아니라 꼬리 끝에 기일게 나 있다. 음.. 꼬리 끝이라.. 이거 풀 맞아? ㅡㅡ;

북경의대 교수들이 중국산 약초에 대한 이야기도 해줬다. 한국사람들이 중국산 약초가 효능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요지. 중국산 약초는 하도 수요가 많아서 대부분 자연산이 아닌 인공산이며, 이때 촉진제를 사용한다는 것. 그래서 중국에서 처방을 할 때는 촉진재일 경우와 자연산일 경우의 약재의 양을 달리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그냥 수입하여 자연산일 경우에 대한 분량으로 약을 지으니 효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이는 한국 의사들의 잘못이라고 강력하고 성토하더라.


북경의대에서 인솔자 박문수씨와, 현지 가이드 강철씨.


옆에 서 있던, 우리의 관광버스를 운전한 중국인 아저씨.


점심식사를 한 식당의 종업원. 옷차림이 참 화려하다. 사진은, 조금 흔들렸다. ㅡㅡ;

이 곳 식당도 정말 컸다. 북경의 거대한 민속촌(?, 아직 공사중이었음) 맞은편의 식당이었는데, 종업원들의 옷차림이 참 화려했다. 사실 이 아가씨 말고(^^:) 아아주 이쁘고 늘씬한 아가씨가 노란 빛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어서 사진좀 찍어도 되냐고 (물론 나랑 같이가 아니라 그 아가씨 독사진을 요청했었다) 물었는데, 돌아온 말은 'No' 한마디였다. 쫌 무안하더라. 그 동안 사진 찍겠다는 사람이 많았나보다.


점심식사 후, 왕부정 거리로 향했다. 북경 최대의 호화거리로, 우리나라의 명동쯤 된다고.


왕부정 거리의 먹거리 골목.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에 연다고 한다. 낮이라서 전부 휴업(?)중.

TV에 나오는 중국의 희안한 먹거리들 소개 프로들이 바로 이 왕부정 거리의 먹거리 골목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뭐, 전갈 등등의 별의별 먹거리들이 있다고. 나중에 한번 밤에 꼭 다시 와보고 싶다.

사진 상으로는 차가 별로 없는데, 이것은 신호등이 점멸될 때를 기다려 찍은 것이다. 거리에는 차가 넘쳐나며, Audi, BMW, Citroen, Honda 및 Hyundai 등의 외제차(?)가 정말 많았다. 특히 Audi A4는, 북경 여행 내내 질리도록 봤다. 아마도 중국에 공장이 있어서인가보다.

여기서 잠깐, 중국인은 문자의 '발음'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데, 그것에 관해 한마디.

앞서 이화원을 설명할 때, 서태후의 침실이었던 낙수당 앞에는 학(鶴, 허)과 병(甁, 핑)과 사슴(鹿, 루) 동상이 각각 한 쌍씩 놓여 있는데, 그 발음이 화평로(和平路, 순조로운 인생의 길)와 같기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사람들은 발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데, 자동차 번호판의 경우도 8888의 경우에는 차값보다도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고 한다. 8은 그 발음이 '빠-'인데, '발전'의 '發'자와 발음이 같기때문이라고 한다.

뻐꾸기 시계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KAISER'시계를 아는가? 현지 가이드 강철씨가 몇년 전 그 시계회사의 사장이 중국 진출을 꾀할 때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때 강철씨가 그 사장에게 조언하길, '벽걸이 시계는 중국에서는 선물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의 판매는 생각하지 마시고, 중국에서 생산하여 수출하는 길을 모색하셔야 할겁니다'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그 사장이 그 이유는 묻지도 않고 '어린 놈이 뭘 안다고 나한테 조언이야?' 했다고.

결과는? 카이저 시계 회사는 몇년전 부도났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중국에서 거의 판매를 하지 못해서였다고.

중국에서 벽걸이 시계를 '장-(뒷자는 생각 안난다. 이건 중국 발음이 아니라 우리나라 발음)'라고 한단다. 그래서 선물을 보낼 때 '송'자를 사용하는데, 그러면 발음이 '송장-'이 된다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절대로 벽걸이 시계는 선물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신동안(新東安)시장(市場). 백화점이다.

북경에서는 백화점을 시장이라고 한다. 위 사진의 백화점은 북경 최대의 백화점으로, 사진의 우측 끝 저 멀리 희미한 건물부터 모두 한 건물이고 하나의 백화점이라고 한다. 물론 좌측으로도 이렇게 크게.. 아마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백화점 6~7개(!) 합쳐놓은 크기가 아닐까 싶었다. 내부의 호화로움도 우리나라의 백화점 못지 않았다. 더했으면 더했지..


신동안 백화점의 정문.


이곳을 마지막으로, 4박5일의 중국, 더 자세하게는 북경과 장가계 여행이 끝났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서 청도(칭따오)로, 청도에서 인천공항으로 귀국.. 인천에 도착하니 저녁 9시 45분. 원래는 인천으로 바로 오는 것이었는데, 표가 잘못처리되는 바람에 비행기 좌석이 부족하여 청도를 경유하게 되었다.

4박5일.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여행.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이후의 첫 휴가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여행이 되도록 하려 애썼고, 그만큼 많이 알아보고 목적지를 선택했으며, 카메라 및 렌즈 등을 알차게 준비했다. 그리고 그 준비했던 것이 무(無)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여행기를 남기기도 하였고..

이번 여행이 앞으로의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어떻게 끼칠런지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테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정말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것. 지금 내 삶의 영역 및 그 테두리 안에만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액티브하고 역동적인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는, 그리고 그러한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