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Aug 2004] 4박5일의 중국여행, 첫째날 - 북경의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2004. 9. 1. 12:13China 2004


인천(서울)발 북경행 CA138기 창을 통해 바라본 하늘.


위 사진은 비행기를 타면 누구나 한번쯤 찍어보는 스카이 샷. ^^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4박 5일의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들른 곳은 북경(北京, Beijing)시와 장가계(張家界, Zhang jia jie)시. 21일 오전에 북경에 도착하여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둘러보고 저녁에 장가계로 비행기로 이동했다. 22, 23일은 장가계의 보봉호수, 천자산, 원가계, 십리화랑, 금편계곡, 황룡동굴 등을 둘러본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이동. 그리고 24, 25일은 천단공원, 명13릉, 만리장성, 이화원, 북경의대, 왕부정거리 등을 둘러보고 저녁에 귀국.

일정이 빡빡한 편이었으나,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편히 다녀올 수 있었다. 다른 여행지에 비해 가격이 그리 저렴한 편은 아니었으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해의 첫 휴가라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간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돌이켜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럼 기행문(?)을 써 볼까나.


21일 아침 7시 3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5년 전인 99년 2월 2일에 영국, 프랑스 여행 이후 첫 출국. 그동안 2년 2개월의 군복무도 하고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다보니 여유가 없었다. 지난번 출국은 김포공항이었는데. 오랜만의 출국이라 약간 상기된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항공사는 에어 차이나. 9시 35분발 CA138.

짐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카메라는 Nikon D100 에 24-85D 줌렌즈 하나만을 마운트 시켰다. 세관에 카메라와 렌즈를 신고하고 출국.

북경으로 향하는 내내, 하늘 가득한 구름 위를 날았다. 구름이 참 이뻤으나, 불현듯 중국에서의 날씨가 걱정되었다. 결과적으로, 5일 내내 아침에는 폭우, 점심부터는 이슬비가 내렸다. 그래서 한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제대로 나온 사진들이 별로 없었다. 특히 바람이 불어 우산이 흔들흔들거렸기에 더욱 더. 그래서인지 사진에 나타난 하늘들이 푸르게 나타나지 않고 다 하얗게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하늘이 약간 흐렸던 것이 하늘과 건물 등을 같이 찍을 때, 오히려 건물들의 디테일들이 더 잘 나타나게 한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원거리 풍경은 다 제대로 안나왔지만.

대략 한시간 반의 비행을 마치고 북경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10시 30분.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한시간 느리다. 이제부터 언급되는 시간은 모두 로컬 타임.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글자가 너무 많아졌다. 이쯤에서 사진 한장.. ^^


인솔자 박문수씨.

박문수씨는 한국인으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창한 중국어실력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 박문수씨는 인솔자이고, 여행 내내 현지 가이드가 한명 동행했다. 북경에서는 강철씨, 장가계에서는 최용철씨. 두분 다 교포3세로, 약간은 어눌하지만 우리나라말을 잘했다.

여행하는 과정 내내 느꼈지만, 유홍준씨의 말처럼 정말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게 된다. 현지 가이드는 방문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방문지를 뜰 때까지, 그곳에 대한 '지식'을 정말 풍부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특히 강철씨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했으며, 아는 것도 정말 많았다. 기행문 곳곳에 적은 내용들 중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적은 것도 많다. 그 덕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만일 현지 가이드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자금성의 비슷 비슷한 모양새의 건물들 등을 별다른 감흥 없이 그냥 훑고 지나가버렸을 것이다.

점심을 먼저 먹고 천안문 광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북경은 건조한 기후로 비가 잘 안오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배수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폭우가 오기 시작하자마자 도로 곳곳에는 물웅덩이들이 생겼다. 다행히 비는 30여분 후 이슬비로 바뀌었고, 우리는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천안문 광장의 북쪽에 위치한 천안문. 모택동의 사진이 보인다.

천안문 광장.. 정말 문자 그대로 넓은 장소였다. 여기서 상투적인 설명을 잠시.. ^^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어 네 배나 더 커진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천안문은 명 영락(永樂)연간인 1417년에 지어졌으며, 황제가 사는 성의 정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렸다가 청대에 개조된 후부터는 '천하(황제)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천안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3.7m 높이의 천안문은 황제의 대형 의식이나 새 군대 파견을 위한 행사를 위해 이용되었다. 황금색 기와 지붕과, 높이 추켜든 추녀, 그림과 조각으로 단장된 대들보, 그리고 주홍색의 웅장한 기둥들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하얀색 대리석 위에 새겨진 조각들은 하늘의 평화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천안문은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 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된 것으로,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도 이에 동참하여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 광장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登小平)은 시위를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같은 해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 난사와 전차 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역사/혁명 박물관, 서쪽은 인민 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인민 대회당.

인민 대회당은 우리나라의 국회쯤에 해당한다고 한다. 위 사진은 인민 대회당의 중앙부분.


중국 역사/혁명 박물관.

역시 박물관의 중앙부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고대 문물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아니다. 중국 고대 문물들은 지금은 대부분 대만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의 박물관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고. 모택동에게 쫓기던 장개석이 국보급 문물들을 모두 대만으로 가져갔고, 당시 공산주의를 추구하던 모택동은 이를 방관(?)했다고 한다.


천안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 오문.


상기 문 하단의 통로.


상기 문 우측에 연결된 각루.

위의 오문 뒤에는 태화문이 있으며, 이곳에서 입장권을 판다. 태화문을 지나면, 드디어 자금성 내부(?)에 진입하게 된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과 같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전체 면적은 72만㎡이며, 총 9999칸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중국에서는 10000 이라는 숫자를 하늘의 숫자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이보다 작은 9999칸의 방을 만들라고 황제가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략 5천여칸 정도라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천안문 뒤에 위치한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잡고 있다.


태화전(太和殿) .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태화전(太和殿)이다.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집무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금성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

태화전이 올라앉은 3층 기단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1천4백88개의 기둥이 있고, 단 아래에는 1천1백42개의 용머리 조각 배수구가 있는데 비가 올 때면 천여 마리나 되는 용의 입에서 일제히 물을 토해내는 광경이 장관이라 한다.


태화전이 위치한 기단의 난간. 용머리 조각을 볼 수 있다.
어떤 건물이던지 이러한 돌조각 난간이 있다. 여기서 일제히 물이 뿜어져 나온다면..


태화전의 현판. 지붕에는 풀이 나 있었다.

북경에서는 2008년에 올림픽이 개최된다. 그래서인지 북경 어디를 가나 공사가 한창이다. 허름한 건물들을 철거하고 높다란 마천루들을 세우는 그네들의 모습에서, 80년대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물론 건물들은 우리나라의 건물들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지만.

자금성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 많은 건물들이 수리중이었다.


태화전 좌측에 위치한 해시계.


태화전의 처마.

자금성의 건물들의 처마에는 액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의 장식인 잡상이 있다. 위 사진을 보면, 제일 앞의 돌출부재는 잡상이 아니라 기와를 고정시키는 것이고, 그 뒤에 9개의 잡상들이 있다. 잡상의 개수가 많을 수록 그곳에 거처하는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뜻하는데, 황제가 거처하던 곳에는 9개의 잡상이 있다. 제일 뒤의 노인(?)상은, 정체를 모르겠다.. ^^;


태화전의 우측에 위치한 되.

당시 정확한 무게를 재기 위해 사용된 되처럼, 정사를 살핌에 있어서 균형맞으면서도 적절히 행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뒤편의 자금성 보수용 철골재들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이 구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둥~ 황제의 의자.

황제가 앉아 정사를 살피던 곳. 저 높은 의자에 황제가 거만하게(?) 앉아 있고, 그 아래의 바닥에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겠지.. 하지만 황제의 저 의자보다 내 듀오백 의자가 더 편해 보인다. ^^


태화전 양 옆에 위치한 물통.

자금성 내부의 건물들은 모두 목조건물이기에 화재에 취약하다. 그래서 예전부터 성 내부의 곳곳에 이렇게 커다란 물통을 두고 화재에 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목재로 된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이러한 물통에 있는 물로 그 화재를 진압한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보다는, 우리나라의 해태상처럼, 화재를 막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된 물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화전 뒤에 위치한 중화전(中和殿)의 현판. 단청의 색이 많이 바랬다.


중화전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 이르기 전에 들르는 곳으로, 중요한 관리가 먼저 황제를 알현하여 그날의 국정현황(?)을 미리 간략하게 보고하는 곳이라 한다. 그리고 황제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차를 한잔 하며 국정운영방안(?)을 생각했다고.

위 사진에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 서면, 황제의 의자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황제의 의좌를 촬영. ^^v

태화전의 의자보다는 훨씬 소박(?)했다. 저곳에 앉아 차를 마시면 맛있을까..


중화전 뒤에 위치한 보화전(保和殿)의 현판.


보화전.

매년 정월과 섣달 그믐의 연회가 열리고 과거가 시행되기도 하던 곳이다. 흉노 등의 북방민족으로부터 사신이 오면, 황제가 이곳에서 사신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등 북방민족이 아닌 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어디서 만났을까? 바로 황제의 침실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


태화전, 중화전 및 보화전까지가 황제의 공식적인 생활공간인 외조(外朝)이고, 그 북쪽으로는 내정(內廷)이라고 하여, 황제의 개인적인 일상생활 공간이다.


보화전 뒤편에서 북쪽의 내정을 바라본 모습. 황금색 지붕이 인상적이다.


내정의 첫번째 건물, 건청궁(乾淸宮)의 현판. 옆의 꼬불꼬불한 그림(글?)의 정체는 모르겠다.


건청궁.

건청궁은 황제의 침실이자, 일상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지금까지와의 건물과 비슷하게 황제의 의자가 있고, 이곳에서 정사를 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2층에는 황제의 침실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주상복합건물쯤이 아닐까. ^^

전술한 바와 같이, 외국의 사신들은 이 건청궁의 1층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북방민족으로부터의 사신은 이곳이 아닌 보화전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이는 북방 민족이 예로부터 끊임없이 중국 대륙의 국가를 침략하기도 하고 약탈하기도 해서, 이들을 대할 때는 좀 더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침실이 있는 건청궁이 아닌 보화전에서 만났다고..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이드의 설명이다. ^^)

2층의 황제의 침실에는, 9칸의 방이 있다고 한다. 황제가 어떤 방에서 자는지는, 매일 밤 황후 또는 후궁을 데리고 건청궁으로 오는 내시들만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건청궁의 뒤편으로는 교태전과 곤녕궁이 있다. 원래 명대에는 황후의 침실인 곤녕궁만 있었으나, 후에 교태전이 더 지어졌다. 황제의 신혼 첫날밤은 황후의 침실인 곤녕궁에서 이루어졌다고.. ^^


궁전의 후원인 어화원(御花園).

누가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의하면, 자객이 나무에 숨어 황제를 암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다고 하나, 본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멋진 나무들이 있었다.

이 곳에는 각지로부터 모아온 자연이 만들어 낸 진기한 형태의 돌들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어화원 문안에 있는 향나무는, 뿌리는 두 나무이지만 윗 부분에서 붙어 한 나무가 된 것으로,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특히 멋진 나무가 한그루 있어서 찰칵.


어화원 뒤의 어경정(御景亭).

기기묘묘한 돌을 특이한 형태로 쌓아 올린 가산(假山, 가짜 산)이 있고, 그 위에 어경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어경정 클로즈업.

어경정은 황제가 북경 시내를 보며 경치를 즐긴 곳이라고 한다.

자금성 내에는 진짜(^^) 남자가 6명 있었다고 한다. 집이 성 밖에 있는 신하들은 논외. 황제, 어의, 그리고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명의 무장. 네명의 무장은 밤이 되면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고 한다. 따라서 밤에 성 내에 있는 진짜 남자는 황제와 어의 두 사람.. 물론 어의는 밤이 되면 자신의 처소에서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 내의 수많은 처자들은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긴긴 밤들을 지새야 했으니..

황제가 이러한 수많은 여인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어의를 밤에 만낙 해주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가 위의 어경정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의를 만나는 것이야 이해(?)가 갔으나, 왜 어경정에 올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은총인지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어경정이 자금성 내에서 성 밖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 성 안에 들어와 성 밖으로 한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운명의 수많은 여인들의 희망들 중의 하나는 바로 성 밖을 바라보는 것..

재밌기도 했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황제 한사람 때문에 평생토록 많은 눈믈을 흘렸을 수 많은 여인들..


드디어 자금성의 북쪽 끝에 있는 마지막 문.

위 사진을 잘 보면 문에 문지방이 없다. 없다기 보다는 원래 있던 것을 후에 제거한 것.


끊어진 문지방 클로즈 업.

자금성 내의 수많은 문에는 문지방이 높게 형성되어 있다. 외국의 사신들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 많은 문들을 지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머리를 숙이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북쪽 마지막 문의 문지방만은, 마지막 황제 부의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부의가 자전거 타기를 매우 좋아해서 자전거를 타고 자금성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ㅡㅡ;

위의 클로즈 업 사진을 보면, 끊어진 문지방에는 떼어낸 문지방을 다시 결합 및 분리할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금성 북쪽 바깥 담장 및 인공 호수.

자금성 담장에는 인공호수를 두어,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 앞서 설명한 어경정에서 바라보면 자그마한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이 바로 이 자금성 담장 둘레에 인공호수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드디어 자금성 탈출.. 1시 30분 부터 3시 30분까지, 대략 2시간에 걸친 자금성 관광. 참 빨리도 돌아다녔다. 자금성 내부 중 개방된 곳은 전체의 20%도 안된다나..

14년 동안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지었다는 자금성. 자금성의 웅장함과 거대함 등에 감탄하게 되면서도, 황제 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니 다시 한번 뒤돌아 자금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만일 혼자 왔다면, 자금성 내의 수많은 건물들의 각각의 의미를 알 수 없었을테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자금성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던 나로서는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버렸을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북경의 무궤도 전차.

다시 현재(現在)로 돌아왔다. 자금성을 나와 북경시내를 향해 이동하다 보니, 위 사진과 같은 무궤도 전차들이 보였다. 즉 전차이지만 궤도가 없는 전차. 필요에 따라서는 충전된 전지로 공중의 전선이 없는 곳에서도 운행을 한다. 무공해 운송수단이라고 자랑한다지만, 필연적으로 교차로 등의 하늘에는 거미줄처럼 수많은 전선이 엉켜있게 마련이고.. 오히려 더 보기 좋지 않았다.


북경 시내의 버스.

북경 시내의 버스를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이드 미러의 모습이다. 마치 토끼가 연상되는 듯한.. 생김새는 다르지만, 갑자기 '이웃의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가 생각났다. ^^

물론 위 버스는 일반 시내버스는 아니다. 일반 시내버스는.. 굉장히 허름하다. ㅡㅡ;

여기서 북경의 교통질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자면, 한마디로 아주 문란하다. 중앙선 침범이 아니라 중앙선을 넘어서 달리기도 하고, 아무데서나 유턴을 하기도 하고.. 그런데 중국인들의 성향이 그래서인지 몰라도, 경적소리가 없었다..


자금성 관광을 마치고, 북경 공항에서 북경발 장가계행 CA1359 비행기를 탔다. 오후 6시에 타서 8시 30분에 장가계 도착. 서울에서 북경까지가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니, 오히려 더 먼 곳이었다.


장가계 공항에서 제일 먼저 만난 글씨. 중국어보다도 한국어가 더 먼저 보였다.

위 글을 보면서 느꼈던 점 두가지. 한가지는 한국인 관광객이 참 많나보다.. 두번째는, 칠판에 써 놓다니.. 그래도 명색이 공항인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장가계 공항은 우리나라 지방 도시의 큰 기차역 규모의 작은 공항이었다. 그리고 밤이어서 잘 몰랐지만, 장가계시는 이름만 시(市)였지 아주 깡촌이었다.. ㅡㅡ;


장가계에서 머물렀던 호텔의 방.

11시경 호텔에 도착. 호텔명은 亘立國際酒店. 영어로는 GENLI INTERNATIONAL HOTEL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호텔은 4성급이었다. 하지만 컨퍼런스 룸 등의 기준 시설을 갖춘, 규모만 4성급이었지 세세한 시설은 참 별로였다. 나중에 북경에 돌아가서 역시 4성 호텔에 숙박했는데, 역시 큰 도시가 더 좋다. 난 시골 체질은 아닌가보다.

준비된 방은 2인 1실이었다. 난, 인솔자였던 박문수씨와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첫날밤(?)은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지만, 다음날 부터는 일정이 끝난 후 중국어가 유창한 박문수씨와 함께 중국의 밤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