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Nov 2004] 아름다움.
2004. 11. 9. 23:30ㆍThought
한달여 전부터 교대역 계단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계시곤 하셨다. 골프 연습장을 가면서 처음 뵈었는데, 처음에는 10번 출구쪽에 앉아계셨다. 무엇인가가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등산용 베낭을 계단에 내려놓으시고, 신문을 깔고 앉아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무엇인가를 읽고 계셨다. 복장도 참 깔끔하고 깨끗하며 단정하셨기에, 난 무척 건강하신 할아버지라서 등산을 즐기시다가, 계단에 배낭을 놓고선 잠시 쉬고 계시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그 할아버지께서 교대역 계단에 앉아계시곤 하시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무엇인가가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등산용 배낭을 옆에 두시고. 내가 출퇴근하는 출구인 9번출구의 계단에 앉아계실 때도 있었다.
일주일 쯤 전, 저녁 8시경 퇴근하면서 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교대역 9번출구로 들어갔다. 그날도 계단 중턱에 그 할아버지의 등산용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계단을 모두 내려와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떤 몸이 매우 불편해보이는 할아버지께서 벽에 두 손을 짚으신 채 힘들게 힘들게 걸어가시고 계셨다. 대략 2초에 한걸음씩. 그 할아버지였다.
순간 난 고민에 빠졌다. 저 할아버지를 부축해드려야 하나 어째야 하나. 저 할아버지의 정체가 무엇일까. 뭐 더 고민할 것이 있나. 그 할아버지는 노숙자였다. 9번출구의 계단에 앉아계시다가 화장실에 다녀오시는 길이신 것 같았다.
난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서 개찰구 앞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았다. 여전히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 할아버지. 새로 입은 깨끗한 양복? '에라 모르겠다'하고 난 그 할아버지께 다가갔다.
'부축해드릴까요?' '어어엉'
중풍에 걸리신 듯, 말씀도 제대로 잘 못하시더라. 오른쪽 팔을 잡아드리려 하니, '외쪽, 외왼쪽' 하셨다. 왼쪽 팔다리가 불편하셨던 것. 왼쪽 팔을 내 목에 두르고 천천히 움직여서 계단 아래에 도달했다. 그때 그 할아버지의 말씀.
'이제 돼앴어, 이거 있으니까아 괘애차나'
계단 가에 있는 차가운 스테인레스로 된 손잡이를 가리키시며 하시는 말씀이었다. 더 부축해드리겠다고 해도 한사코 손사레를 치시던 그 할아버지.
계단 위의 그 할아버지의 배낭이 있는 곳까지 부축해드리려다가 그만두고 돌아섰다. 불현듯,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목적지가 계단 중턱이라는 것을 내게 보이고 싶지 않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보다도 키가 크신 분이니, 그분과 동년배로 따진다면 체격도 좋으신 할아버지셨다. 연세가 드신 후 중풍에 걸려 왼편 팔다리가 불편하시게 된 것 같았다. 며칠을 전철역에서 기거하셔서인지 약간은 때가 탔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 집에서 작심하고 나오신 듯, 무엇인가가 잔뜩 들어있는 큰 등산용 배낭. 보아하니 웬만큼 살림살이가 되는 집에 살고 계셨던 것 같은데, 무엇이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집을 나오시게끔 한 것일까.
그 이후로, 그 할아버지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교대역 9번 출구 및 10번 출구의 계단에서 사라지셨다. 교대역의 다른 출구의 계단에 계실런지도,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셨거나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찾았을런지도. 하지만 이 모든 건 내 추측일 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추측을 해보자면, 그 할아버지는 내게 계단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으시지 않아서일런지도.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저 위의 사진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드나드는 카페 앞의 예쁜 꽃과 아기자기한 불빛으로 장식되어 있는 테라스?
평상시 주위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기는 커녕 악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가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지만, 기분이 더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든 생각. 과연 난 내 부모님께 효도는 못할 망정,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와 행동 등으로 부모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Dec 2004] Gmail. (0) | 2004.12.12 |
---|---|
[13 Nov 2004] 中心主義。 (0) | 2004.11.13 |
[22 Oct 2004] 관습헌법? (0) | 2004.10.22 |
[18 Oct 2004] 이건희 삼성회장이 싫어하는 직장인. (0) | 2004.10.18 |
[5 Oct 2004] 열정. (0) | 2004.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