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y 2004] 이공계 기피현상. (앞 포스트로부터 이어지는 글)

2004. 8. 19. 14:21Thought

이곳 egloos에는 한 포스트(글) 당 올릴 수 있는 글자수의 제한이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앞 포스트(글)에서 퍼온 글이 너무 길어서 뒷부분이 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포스트(글)는 앞 포스트(글)에서 퍼온 글의 뒷부분이다.



IMF 경영혁신의 최대 피해자는 연구인력

IMF 이후 제일 먼저 잘려나간 것이 「전담추진반」에 연줄을 확보하지 못한 연구소의 연구인력들이었다.
총수가 직접 나서서 「우리 기업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밤새워 고심했다면 연구인력은 제일 마지막 감원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했다.
이게 대한민국 기업의 비극이고, 나라의 비극이다.
한국은 기업의 회장이 구설수를 외면하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잭 웰치는 「전담추진반」을 두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감원대상을 고르고, 자르고, 불필요한 부서와 인력을 잘라 냈다.
1997년 초 한 경영자 모임에서 내게 강연을 요청했다.
당시 「가격 경쟁력만이 살길이다」는 구호가 위력을 떨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강연을 하면서 『아직도 가격 경쟁력을 강조하는 정부 관료와 기업 경영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기업활동에서 가능한 한 끝까지 피해야 할 것이 바로 경쟁사와 가격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가격경쟁이란 최후의 승자 하나만이 남을 때까지 출혈을 하면서 계속해야 하는 죽음의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나서서 「죽음의 경기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아직도 외치고 있다.
우리의 제품들은 제조원가가 높은 반면에 판매가가 낮아서 가격 경쟁력을 따질 시기를 지난 지 오래다. 우리 제조업은 미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에 비해 높은 금융 비용과 부동산 가격, 물류 비용, 로열티, 실질 임금 등이 높아 「5高」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울타리를 친 내수시장에서 국내 가격을 높게 받아 연명해 왔다. 마치 친척들에게는 비싼 값을 받고 일반인에게는 싼 값에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긴 것과 같다.
운동경기에서 우리 팀이 계속 실점을 하면 관중들은 『작전을 바꾸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우리의 과거 작전은 가격 경쟁력이었으나, 가격 경쟁력 작전으로 가서는 중국은 물론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살길은 가격을 높여서 받을 수 있는 「가격 결정권」을 확보하는 길뿐이다. 제품가격을 높이고도 물건을 파는 방법은 독특한 제품, 경쟁상대가 없는 高附加(High Touch) 제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겠다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
중국에는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은 물론 화상 네트워킹과 마케팅 능력이 있고, 일본에는 기술력이 있는데 우리가 무슨 근거로 가격 결정권을 가질 수 있을까?
해답은 창의력에 있다.
우리에게 창의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 모든 걸 해봤는데 아직까지 안 해 본 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혹시 창의력이 있을지 모른다. 두 번째는 나 스스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창의력이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창의력을 가지고 소규모 실험을 해서 세계시장에 성공여부를 타진한 다음 군단 병력에게 파는 식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3大 효자 상품인 휴대폰, LCD, 자동차 산업은 5년 안에 중국의 추격을 받아 자멸할 운명이다.

'가격 결정권' 만이 살길이다

글로벌 마켓에 진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마켓을 독점 내지 선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가격 결정권만 가지면 우리는 동양의 맹주가 될 수 있다.
우리 기업이 가격결정권을 가지려면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내가 내놓은 아래의 물음들에 독자들이 응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정부가 5년 이내에 理工系 기피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대책을 내놓을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는가?」
「기업이 5년 이내에 정부지원 없이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안을 추진할 확률은 몇 퍼센트라고 보는가?」
「대학이 5년 이내에 스스로 교육개혁을 추진할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학부모들이 내 자식만은 편안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고, 자녀에게 理工系 대학 진학을 권유할 확률은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항목이든 『10% 이상』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응급실로 가야 한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에는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 산업은 도시가스에 밀려 설 자리를 뺏긴 구공탄 공장에 비유될 수 있다.
생산성을 향상해 하루에 구공탄을 10%씩 더 찍으면 구공탄 공장은 살아날 수 있을까? 구공탄 공장의 「高임금·低효율」이 해소되면 구공탄 공장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답은 둘 다 『아니오』이다.
도시가스가 도입되는 초기에 『도시가스로 업종을 전환하라』고 했다면 연탄공장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웃기지 마라. 온돌방이 존재하는 한, 겨울철이 존재하는 한 구공탄은 영원하다』
연탄공장은 그렇게 戰意(전의)를 불 태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음가게와 냉장고, 우마차와 용달차, LP와 CD 모두 똑같은 원리다. LP 5000장을 모은 음악 애호가에게 CD로 바꾸라고 한다면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오스트리아에 여행 갔을 때 밥 굶으면서 산 오페라 판, 유학할 때 아내에게 잔소리 들어가며 산 클래식 전집,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이다.
그래서 음악 애호가도 이렇게 외친다.
『클래식이 존재하는 한, 아니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LP는 영원하다』
그러나 지금은 축음기 생산이 중단되어 더 이상 LP를 들을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과거의 산업구조가 일직선인 走路(주로)를 눈감고 뛰기만 하면 되는 마차 경주였다면, 지금의 산업구조는 폴로 게임이다. 말의 눈을 절대 가리면 안 되고 走路도 일직선이 아니고 그라운드다. 어디로 갈지 모르며 빨리 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빨리 설 줄 알아야 하고 세 박자 쉬었다가 달릴 수도 있고, 세 걸음 뛰다가 정지도 해야 하는 복잡한 게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마차 경주 챔피언들이 폴로 복장을 하고 나와서 설치고 있는 형국이다.
요즈음 우리의 국가 목표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이다.
GNP로 국가의 비전을 내세우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의식은 거의 필리핀 수준이다.
우리에게는 「이웃을 돕겠다」, 「인류에 혹은 국제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정신이 희박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기 조차 힘들다. 원래 패러다임의 전환은 극히 일부가 시도하는 것이고 시도한 사람 중에 극히 일부가 성공한다. 그러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理工系 기피의 최종 피해자는 국민

조선조의 한 왕이 정승들에게 『광풍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초가삼간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영의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광풍이 쇠잔해지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 얘기는 우리나라 지도계층의 철학을 잘 보여 준다.
사방의 문을 열어 놓으면 초가집은 무너지지 않겠지만, 방 안에 있던 民草(민초)들은 다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 바람에 날려가서 죽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끈질기게 버텨왔다. 7년 전쟁에서 절반에 가까운 민초들이 사라진 임진왜란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理工系의 위기는 역사적 뿌리가 깊다.
理工系의 위기에는 기업과 대학, 사회 전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잭 웰치의 얘기에서 거론했듯이, 理工系의 위기는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각오로 달라붙어야 할 문제다. 정책 구호나 유인책 몇 가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理工系 기피현상은 대학이나 理工系 대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기업, 우리 사회 전체가 理工系 기피현상의 최종 피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살고 싶으면 해결해야 하고, 죽고 싶으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냥 놔두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