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y 2004] 이공계 기피현상.

2004. 8. 19. 14:19Thought

읽어볼만한 글이다.

이공계 지원하면 장학금, 병역면제혜택을 주겠다.. 고 한다면, 병역면제받고 장학금 받고 대학 다닌후, 그 후에는?

이공계 기피현상의 본질은 군대갔다오고,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용돈 벌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한 후의 문제라는 것을 모르다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는 걸 말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지.

내가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 들어가던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이런 정도의 분위기까지는 아니었는데.. 헛 참.

얼마전 00학번 모 한의대생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녀석의 질문.
'형, 형은 그냥 서울대라는 이름 때문에 서울대 물리학과 간거죠?'

내 대답.
난 임마 무슨 대학 무슨 학과든 다 갈 수 있었단다. -.-

이런 말을 한 나도 한심하다.

아래 퍼온 글은 서울대 공대 교수가 쓴 글이라네. 과 친구 병익이 블로그에 갔다가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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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大는 관악산의 최고 대학

많은 사람들이 理工系(이공계) 교육의 위기를 얘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理工系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기다. 이건 아주 간단명료한 문제다. 살고 싶으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죽고 싶으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냥 놔두면 된다.
나는 1991년 「서울공대 白書(백서)」를 발간했다. 「서울대학은 국내 최고의 대학도 아니고, 세계 400위 안에도 못 드는 관악산의 최고대학」이라는 게 백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울대학은 지금도 관악산의 최고 대학일 뿐이다.
2002년 大選 때 서울大 폐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관악산 골짜기의 골목대장밖에 안 되는 대학을 없애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가?
나는 「서울공대 白書」와 1992년에 펴낸 「W 이론을 만들자」에서 「오늘날 우리 공학교육의 위기는 5년 내지 10년 후 국가 전체의 위기로 냉큼 대두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IMF가 터지자 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족집게같이 예견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내다볼 수 있는 일이었다.
理工系 교육이 왜 국가위기를 진단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바퀴는 두 개다. 하나는 국가 경쟁력이고 하나는 가계부 작성이다. 돈을 잘 벌어야 하고, 번 돈을 잘 써야 하는 이치다. IMF는 벌이는 없고 가계부 작성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온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계부 작성을 투명하게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엉망이었던 가계부 정리는 대충 끝났다. 구멍난 곳을 메우는 데 150조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벌이를 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W 이론」에서 나는 세계 1등 기술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사회에서의 경쟁은 고스톱 판과 포커 판의 게임처럼 1등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2등이나 3등은 家産(가산)만 탕진할 뿐이다.
당시에는 『도대체 무슨 얘기냐』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이제 이 얘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예전에는 인구 1억 명이면 내수시장만으로 국가를 지탱할 수 있다고 했지만 요새는 인구가 문제가 아니다. WTO(세계무역기구), FTA(자유무역협정) 등 글로벌 네트워킹 때문에 인구가 10억 명이 넘어도 기술이 없으면 굶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이외에 팔아먹을 것이 없다.
제주도를 天惠(천혜)의 관광지라고 하지만 1년에 비오는 날이 100일이 넘어 세계적인 관광지로는 부적격이다. 발리나 하와이에 가 본 사람들은 내 얘기에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관광국가로 먹고 살기에 우리의 문화유산은 너무 빈약하다.
벌이가 없으면 아무리 가계부를 잘 써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원천은 과학기술뿐이다. 대한민국의 대학이 과학기술을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 학생들이 과학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있느냐는 우리나라가 5년 후, 10년 후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들은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源泉(원천) 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있는가? 답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삼성전자가 핸드폰을 하나 만들 때 퀄컴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판매가의 15% 정도다. 반도체를 만들려면 설비와 부품을 일본에서 모두 수입해야 한다. 앞으로 남고 뒤로 믿지는 장사다. 그것도 삼성전자의 얘기다.
정부는 「2만 달러 국민소득 달성을 위해 5大 성장전략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한다. 독자적인 기술 없이 어떻게 5大 성장 전략 사업을 키우겠다는 말인가?

미련한 최후의 변절자들

지난해 서울공대생 23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적어도 100명에서 150명의 工大生이 머리를 싸매고 골방에서 법전을 외워대고 있다는 증거다. 아마 그것보다 더 많은 수의 학생들이 『나도 늦기 전에 고시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은 채 考試공부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서울공대 학부생 5500명 가운데 10% 이상이 考試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大 물리학과에 다니던 한 학생이 다시 大入 시험을 봐서 서울의대에 입학했다. 면접장에서 제자를 만난 물리학과의 한 교수는 기가 막혀서 『(수능시험에서) 물리 과목은 다 맞았겠지』라고 했다고 한다.
考試공부를 하고 있는 서울大 자연대 와 공대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돈 잘 버는 의사·한의사·변호사가 되겠다고 작심한 아이들에 비교하면 미련한 「최후의 변절자」에 불과하다.
나는 이 제자들이 딱하기만 하다. 눈치 빠르게 일찌감치 돈 버는 쪽으로 갈 것이지 서울공대에는 왜 들어왔다는 말인가.
서울공대나 자연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특출나게 잘 했고, 과학기술을 연구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졌던 친구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유가 뭘까? 우리 사회가 『이공계 공부해야 이렇게 비전이 없는데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理工系 공부를 계속 할 거냐』면서 이 아이들을 끊임없이 고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大田 대덕의 연구원들은 밤 12시까지 연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 최고의 연구자 학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20代, 30代에 습득한 기술과 이론들은 순식간에 과거의 것이 되고 만다. 理工系 연구인력의 停年은 대부분 40代다.
理工系 인력은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 뒤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을 기다리는 건 「사오정」이라는 운명이다. 과학기술 인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눈길에는 존경과 냉소가 뒤섞여 있다.
이들이 한국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라는 걸 어렴풋이 인식한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활동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싫다. 국민의 이해부족과 낮은 지위와 보수 때문에 이공계 출신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이런데도 당신들은 자식들을 이공계에 보낼 것인가?
의대와 한의대에, 법과대학과 상과대학에 자녀들을 보내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개인차원의 합리적인 선택이 모여 사회차원의 非합리적 선택이 되는 현상을 미리 알고, 차단하는 것은 국가 지도자의 몫이다.

재벌 총수들 『공장이 없으면 파이낸싱이 안 되잖아』

두 재벌기업 총수에게 『왜 기술력도 확보되지 않은 공장들을 자꾸 늘려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의 대답이 똑같았다.
『李교수, 그러니까 理工系 출신들이 눈치 없다는 얘기를 듣는 거요. 공장이 없으면 파이낸싱이 안 되잖아』
두 총수가 이끌던 거대 재벌기업 두 개는 IMF 전후에 무너졌다.
그때 한 재벌 총수는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생산성 향상, 그거 별 의미가 없어요. 5~6% 이윤이 남는데 30% 생산성 향상시켜 봐야 기껏 2% 포인트 이윤을 더 남기는 겁니다. 공무원들하고 골프 치고, 술 먹고 해서 큰 프로젝트 하나 따오면 20%, 30% 이윤이 남아요. 로비 잘하는 게 생산성 향상시키는 것보다 열 배는 쉽게 돈 버는 일입니다』
공장을 세워서 은행 돈을 빌리고,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하고, 덩치를 키워 정부의 특혜를 받고…. 그런 식으로 기업들은 살아왔다. 그 체질이 지금도 과히 많이 바뀌지 않았다. 서울大 법대와 상대를 나온 사람들은 재벌기업의 비서실, 기획실, 마케팅실에 근무하면서 정·관계에 포진한 동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지금도 理工系 졸업생들은 『당신들이 중요하다』는 말만 듣지 계속 벽지 공장을 돌게 된다. 理工大 졸업생들의 좌절은 여기서 시작한다. 엔지니어들이 말도 못 하고 속을 끓이는 사이에 몇 년 후배인 法大·商大 출신들은 쭉쭉 승진을 한다.
理工系 졸업생은 승진에 한계가 있다. 경영진에 많이 기용되지를 못한다. 벽지의 공장에 처박혀 있으니까 「촌닭 같아서」임원으로는 못 쓰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엔지니어들에게 프라이드가 있었다. 공장에서 생산성을 향상시켰다고, 품질개선을 했다고 총수와 간혹 악수할 기회도 있었다.
1960년대, 1970년대에 기업들이 외국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면, 영문 매뉴얼을 보고 가동시키는 일을 서울공대 출신들이 했다. 복잡한 영어 매뉴얼을 보고 다들 기겁을 하는데 그나마 서울공대생들이 그걸 해낼 수 있었다.
요즈음은 그 일을 외국에서 공부한 교포 출신들이 대체한다. 영어 실력이 서울공대생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기업 내부에서 『서울공대 나온 친구들이 기술을 알면 얼마나 더 아나, 교포 2세가 낫다. 미국에서 대학교 2학년 다니다가 왔다는데도 또랑또랑하고 매너 좋고, 아무나 만나도 섭섭하게 안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理工系가 아니라 理理系

왜 대학들은 이렇게 기술 경쟁력이 없는 공대생들을 양산하고 있을까?
서울工大는 물론이고 대다수 공과대학이 이론 교육에 치중한다.
강의 시간에 외국 이야기만 들으니 학생들은 감흥이 일지 않는다. 학생들이 『우리가 직접 실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으면 교수들은 『여기서는 못해』하고 의욕을 꺾어 버린다. 학생들은 교수들로부터 「너희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계속 받는다.
서울工大 교수의 학위논문 80% 가까이가 이론이다. 理工系가 아니라 理理系(이이계)인 셈이다. 우리 공대생들은 실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유학 가면 다 촌닭이 된다.
이런 현실에 대해 교수들은 『실험실습비도 없고, 실험장비도 없다, 어차피 나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느냐』며 항변한다.
그러니 理工系 출신들은 유학 가서도 다 이론 쪽으로 간다.
기업은 해외(주로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오고, 理工系 대학은 해외 학계의 발전 내용을 어학실력이 닿는 대로 번역해서 가르치고 있다. 産學(산학)협동이 있을 수 없다. 수요도 없고 공급도 없다. 기업과 대학 사이에 오가는 연구비는 기업들이 理工系 학생들을 조달하려는 차원에서 에이전시한테 주는 커미션일 뿐이다.
최근 들어 서울工大의 커트라인이 웬만한 지방의 의과대학보다 떨어진다. 『공대 지원자가 정원에 미달한다는 사실이 신문에 자꾸 보도되니까 공대가 더 죽는다』며 정원 미달 사실을 숨기는 것을 대책으로 들고 나오는 교수도 있다.
입학생들의 실력이 떨어져 수학·과학 「보충반」을 편성해야 할 지경이다.
『이런 수준의 학생들을 데리고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하라는 말이냐』고 한탄하는 동료 교수들에게 나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생들이 들어왔을 때 과연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공학교육을 했느냐』고 묻는다.
최근 정부에서 「理工系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겠다」, 「병역 혜택을 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이런 대중적 구호를 보면 옛날 전봇대에 붙어있던 술집 여종업원 호객 구호가 생각난다.
「침식 제공, 선불 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구호를 보면 『아, 저곳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판단을 내릴 것이다.
「국민을 먹여 살리는 건 산업기술이고, 그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理工系 교육」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없이 몇 개의 사탕을 나눠 주는 것으로 理工系 교육을 살려낼 방도는 없다.
내 실험실의 졸업생들 중 11명이 국제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졸업생들은 물론 교수인 나 역시 자부심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과 국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것, 이것이 우리 理工系의 현주소다.

이공계 기피의 역사적 뿌리

우리 사회는 기술을 賤視(천시)하던 조선조의 문화로 회귀하고 있다.
기술을 중시하고 理工系가 우대를 받았던 1960년대 이후의 시기는 기술을 냉대한 긴 역사에서 잠시 반짝한 예외적인 시기였다. 역사 속에서 내 선배 과학자 기술자들은 모두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신라 無影塔(무영탑: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의 전설은 아주 로맨틱하다.
탑 만들기에 동원된 石工(석공)은 오랫동안 아내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아내는 남편이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스스로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탑 만드는 데 동원되면 죽도록 고생만 하고, 가정이 파탄난다」
佛事(불사)에 동원된 석공들에게 오두막 하나씩 지어 주고 거기서 아내가 밥을 지어 주게 했을 법한데도 위정자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영탑의 전설이 주는 교훈은 「石工에게 시집가면 죽는다」였을지 모른다.
에밀레종 설화도 마찬가지다.
共鳴(공명) 설계는 컴퓨터 기술로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신라 시대에 종을 만들려면 보통 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독촉과 질책을 받았으면 끓는 쇳물에 제 아이를 넣어 볼 생각을 했을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흉내만 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대대손손 축복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아들을 제물로 바쳐 맑고 그윽한 소리를 만들어낸 신라의 종 만드는 기술자가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얘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설화 역시 「주조 기술자가 되려면 자식을 제물로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벽 안개처럼 은은하게 사방에 퍼지게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술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천민 계층이었다.
장영실을 보자. 관노 출신 천민인 장영실은 당시 지극히 예외적으로 從 6품까지 벼슬이 올랐다. 세종이 신임을 하니 문반들의 시기 질투가 대단했다. 문반들은 「천민이 從 6품까지 올라가는 것을 좌시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 아래 세종에게 온갖 간언을 했으나 세종이 듣지 않았다.
그러다 장영실이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공주의 가마 손잡이가 부러져 공주의 가마가 구르고 말았다. 왕족의 신체에 상처를 입히면 모반죄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세종도 감싸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가마 손잡이에 미리 톱질을 해 놓았을 것이라는 소문이 당시 돌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후 아무도 장영실이 어떻게 됐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과학 기술자로 출세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官尊民卑

국내의 몇 개 안 되는 과학관에 가서 보면 서양 과학자들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전부 기록돼 있는데 우리나라 과학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출생연도만 밝혀져 있을 뿐 사망연도는 물음표로 처리돼 있다. 과학 기술자들의 말로가 안 좋았다는 증거다.
나는 1990년대에 「손빨래 세탁기」, 「골고루 전자레인지」, 「따로따로 냉장고」 등을 개발해서 「올해의 히트상품」으로 선정된 제품 6개를 만들었다. 이 덕에 1996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세종문화상(기술부문)을 받았다.
시상식 전날 예행연습이 있다고 해서 불려갔다. 단상에 올라가는 걸음걸이가 씩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몇 번을 단상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연습하러 나온 女高 합창대원들 앞에서 서울工大 교수의 자존심은 말이 아니었다.
이튿날 시상식장에서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상을 맡은 李壽成(이수성) 국무총리는 나와 함께 서울대학 교수로 일했던 분이다. 그의 연설이 이어지는 10여 분 내내 나는 객석을 등진 채 그를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다. 시상식의 주인은 상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념 사진을 찍으려고 맨 앞에 앉아 사진기를 들고 있던 아내는 나의 뒤통수만 실컷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상품 개발로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는 나는 수상 소감 한 마디 못해 보고 단상을 내려와야 했다.
조선 시대 장영실의 얘기가 아니라, 1996년 서울工大 교수가 겪은 일이다. 「이러니 다들 관료가 되려고 하지 누가 과학기술자가 되려고 하겠나」 하며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十面楚歌

나는 1986년부터 우리의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1992년 「W 이론을 만들자」에서 우리 경제가 十面楚歌(십면초가)에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우리의 산업구조는 선진국에서 도입한 낙후기술과 설비에 低임금을 결합한 허약 체질이었다.
주문자 상표를 부착한 얼굴 없는 수출로 우리 상품은 저급품으로 분류돼서 외국의 低소득층에 팔려 나갔다. 유통망과 애프터 서비스 시스템이 없어 단골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져 실속 없는 산업팽창이 이뤄졌다.
1975년을 기점으로 우리 산업의 틀을 바꿔야 했다.
1975년까지만 해도 「低임금 양산조립」은 한국에게 보장된 독무대였다. 그렇지만 기술도입과 단순 모방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했고, 값싼 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을 앞세운 중국이라는 넘을 수 없는 산이 눈앞에 있었다.
1975년의 기술도입료가 전년도에 비해 갑자기 4배나 늘어났다. 이때부터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중점을 두었어야 했는데 우린 그걸 하지 못했다. 기술 도입료와 로열티가 계속 올라가자 기업들은 현장 작업자들만 다그쳤다.
지금도 관료와 기업인들은 『高임금 低효율이 해소되어야 경제위기가 해소된다』며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한다. 허리띠만 졸라매면 위기가 해소된다는 말인가? 이웃집에서 카시미론 솜 이불을 팔아대는데 낡은 솜틀 기계의 생산성을 높인다고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이것은 1975년식 사고방식이다.
제조업은 기술정보, 상품기획, 연구개발, 설계, 설비계획, 부품조달, 생산, 판매기획, 판매, 사후관리 등 대략 10단계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우리의 제조업은 상품기획과 연구개발 설계는 해외기술의 도입으로 대체했고, 판매 및 事後관리 단계는 외국 바이어들에게 기대 왔다. 우리 손으로 직접 담당하였던 것은 생산부분뿐이다.
우리 제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응급 처방은 무엇일까.
우선 선진 제품의 모방에 심취했던 逆개발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독자적으로 상품을 기획하고, 창의적인 연구개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상품 기획을 해 본적이 없다.
선진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도입하고 모방설계를 했으며, 세계시장에서 소비자 구매욕이 입증된 상품만 골라 뒤늦게 기획에 착수하였다.
나는 1989년 산학협동을 통해 「하이 터치」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상품을 개발하자는 게 목표였다.
1989년에 만든 입체형 컴퓨터 키보드는 손목의 피로를 덜어 주는 제품이었다. 1993년에 출시되어 1조원 이상 팔린 맥킨토시 키보드보다 4년 앞선 기획 상품이었다. 한국의 대기업은 「이제까지 이런 제품을 본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대량생산을 망설였다.
『그렇게 좋은 키보드라면 왜 IBM에서 아직까지 개발을 하지 않았겠는가』가 업체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우리 기업은 남의 것을 모방만 해왔기 때문에 남이 안 하는 것을 만들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리모콘으로 조정하는 자동 진공청소기를 개발했다. 최근 필립스가 제작해 국내에서 한 대에 200만원 이상으로 팔리는 자동 진공청소기와 똑같은 모양과 기능의 제품이다. 차이가 있다면 필립스는 진공청소기에 자동 감지장치를 장착했다는 것뿐이다.
자동 진공청소기의 기획 아이디어를 냈지만, 어느 전자제품 업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산학협동을 추진하면서 한국 기업인들 머리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三不可(삼불가) 이론」을 발견했다.

경영혁신은 죽지 않으려고 하는 일

신제품 개발을 위한 상품기획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기업의 관리자들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개발을 기피한다.
첫째,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 가격 상승 요인이 발생한다는 이유다.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면 제품 원가가 올라가고 판매가도 높아지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量産(양산)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가 나온다.
나는 직육면체로 만든 제품의 모서리를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게 곡선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기업 쪽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곡면으로 바꾸면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신뢰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는 논리다.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면 부품이 늘어나고 고장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기업 측에서는 「三不可 이론」으로 신제품 개발에 반대했다.
어떤 기업이 일류기업인가?
일류기업은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산업분야를 개척하고 최고 혹은 최초의 기술과 상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 둘째, 이 기업을 모방한 다른 기업들이 덩달아 돈을 벌어야 한다. 즉 보고 따라 하는 二流기업들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초일류기업이란 무엇인가?
국적과 사업 분야를 막론하고 全세계의 일류기업들이 초일류 기업의 기술과 상품 경영철학을 본받아서 큰 이익을 내야 한다. 초일류로 분류될 수 있는 기업은 全세계에 몇 개 밖에 없다. 이런 기준대로라면 한국에는 불행하게도 초일류 기업이 없다.
삼성은 일류기업이지 초일류기업이 아니다.
삼성이 「新경영」을 추진할 때 삼성 임원들의 방마다 「잭 웰치」의 책이 꽂혀 있었다.
나는 삼성 임원들에게 『삼성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잭 웰치를 쫓아갈 수 없다』고 얘기했다.
삼성 사람들이 『왜 안 되냐』고 묻기에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잭 웰치는 현재 1등이거나 가까운 장래에 1등이 될 수 있는 2등을 빼놓고는 다 잘라냈다. 삼성이 그렇게 할 수 있나? 삼성그룹이 공중 분해되어도 좋은가? 잭 웰치가 한 번에 10만 명을 감원했다. 한국적 정서를 이겨내고 수만 명을 감원시킬 자신이 있나? 잭 웰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서 직접 서류 나르고 재떨이 던지며 경영혁신에 달라붙었다. 당신 회사의 회장이 그렇게 할 수 있나?』
삼성 관계자들은 『新경영을 하려는 총수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고 항변했다. 나는 『경영 혁신은 총수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안 하면 죽기 때문에 하는 것이 경영혁신』이라고 했다.
그러면 삼성 관계자들은 대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죽기 살기로 경영혁신을 안 하는데 왜 삼성은 안 죽습니까?』
내 대답은 이렇다.
『지금 사방에 암 걸려서 링거 꼽고 누워있는 환자들이 수두룩한데 폐병 걸린 환자를 죽일 수는 없지 않나?』
한국에서 경영혁신을 하겠다는 기업들은 대개 「전담추진반」을 둔다.
전담추진반은 보통 상무급이 팀장이 된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상급자인 사장들의 목을 자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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