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Aug 2001] 굴비와 조기에 관한 진실
2004. 6. 4. 13:07ㆍThought
어제 점심에 공주에 있는 '싸리골'이라는 음식점에서 굴비정식을 먹다가 생각난 건데, 왜 음식 메뉴에 '굴비정식'은 많아도 '조기정식'은 없는 것일까? 조기와 굴비의 차이점은 다들 알겠지만 조기를 간해서 말린 것이 굴비이다. 다음은 동아사전에 나와 있는 굴비에 관한 설명.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아가미 속에 가득히 소금을 넣고 생선 몸 전체에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아 2일쯤 절인다. 절인 조기를 꺼내어 보에 싸서 하루쯤 눌러 놓았다가 채반에 널어 빳빳해질 때까지 말린다.
굴비(좌)와 조기(우)
말린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의 이자겸에 의해서라고 한다.
고려(高麗) 제 16대 임금 예종 때에 척신이었던 '이자겸' 은 그의 딸 '순덕'을 예종 에게 시집 보낸 뒤에 공신이 되었다. 그런 뒤로 이자겸은 그 딸이 낳은 외손자인 제17대 임금 인종에게 셋째 딸, 넷째 딸을 시집 보내 권세를 잡았다. 이때 이자겸은 '이씨'가 왕(王)이 된다는 차위설을 믿고 은근히 왕위를 넘겨다보게 되었다. 이와 함께 권세가로서의 이자겸의 횡포가 극심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심복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이자겸을 잡아들였다. 이자겸은 영광(營光)에서 귀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칠산 앞 바다(법성포)에서 잡힌 조기 맛에 반하여 이 조기를 소금에 절여 바위에 말렸다. 그리고 나서 이자겸은 자기가 "비굴" 하지 않다는 뜻으로 굴할 굴(屈) 아닐 비(非)의 굴비(屈非)라고 이름지어 임금에게 진상했다. 이 말린 조기를 먹어본 고려 17대왕인 인종이 별미라며 해마다 진상토록 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 법성포(좌)와 현재의 법성포(우)
그런데 왜 식당에는 조기정식, 조기백반은 없고 굴비정식, 굴비백반만 있을까?
이자겸이 처음 반한 맛은 굴비 맛이 아니라 조기 맛이었을 것이다. 그걸 임금에게 진상하려니 중도에 상할 테니까 간을 해서 말려서 올렸을 것이고, 그러니 임금은 조기는 먹어보지 못하고 굴비만 먹게 되었을 것이다. 그 맛이 좋으니 임금은 굴비를 계속 찾았을 것이고, 이로인해 '굴비'가 '조기'를 제치고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아닐까? 본의 아닌 청출어람(靑出於藍). 그래서 지금껏 식당에는 조기정식, 조기백반은 없고 굴비정식, 굴비백반만 있는 게 아닐런지.
별 생각없이 먹어서인지, 조기가 더 맛있는지 아니면 진짜 굴비가 더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조기와 굴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며 먹어볼 기회가 있기를.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아가미 속에 가득히 소금을 넣고 생선 몸 전체에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아 2일쯤 절인다. 절인 조기를 꺼내어 보에 싸서 하루쯤 눌러 놓았다가 채반에 널어 빳빳해질 때까지 말린다.
말린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의 이자겸에 의해서라고 한다.
고려(高麗) 제 16대 임금 예종 때에 척신이었던 '이자겸' 은 그의 딸 '순덕'을 예종 에게 시집 보낸 뒤에 공신이 되었다. 그런 뒤로 이자겸은 그 딸이 낳은 외손자인 제17대 임금 인종에게 셋째 딸, 넷째 딸을 시집 보내 권세를 잡았다. 이때 이자겸은 '이씨'가 왕(王)이 된다는 차위설을 믿고 은근히 왕위를 넘겨다보게 되었다. 이와 함께 권세가로서의 이자겸의 횡포가 극심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심복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이자겸을 잡아들였다. 이자겸은 영광(營光)에서 귀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칠산 앞 바다(법성포)에서 잡힌 조기 맛에 반하여 이 조기를 소금에 절여 바위에 말렸다. 그리고 나서 이자겸은 자기가 "비굴" 하지 않다는 뜻으로 굴할 굴(屈) 아닐 비(非)의 굴비(屈非)라고 이름지어 임금에게 진상했다. 이 말린 조기를 먹어본 고려 17대왕인 인종이 별미라며 해마다 진상토록 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왜 식당에는 조기정식, 조기백반은 없고 굴비정식, 굴비백반만 있을까?
이자겸이 처음 반한 맛은 굴비 맛이 아니라 조기 맛이었을 것이다. 그걸 임금에게 진상하려니 중도에 상할 테니까 간을 해서 말려서 올렸을 것이고, 그러니 임금은 조기는 먹어보지 못하고 굴비만 먹게 되었을 것이다. 그 맛이 좋으니 임금은 굴비를 계속 찾았을 것이고, 이로인해 '굴비'가 '조기'를 제치고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아닐까? 본의 아닌 청출어람(靑出於藍). 그래서 지금껏 식당에는 조기정식, 조기백반은 없고 굴비정식, 굴비백반만 있는 게 아닐런지.
별 생각없이 먹어서인지, 조기가 더 맛있는지 아니면 진짜 굴비가 더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조기와 굴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며 먹어볼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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